왜 그림이어야 했을까

어렸을 때 나는 늘 힘들고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그 감정들은 마구 쏟아져 내리는데,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노래, 일기, 글, 그림 같은 것들을 참 좋아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이 너무 버거워서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어서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마도 회피형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10대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입시 준비를 잠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밤을 새우고, 나에 대해 고민하며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풀어내던 조용한 새벽 시간. 심야 라디오를 들으면서 혼자 작업하던 그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세상엔 너무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순수하게 그림을 좋아하고 싶다"는 핑계로 또 도망쳤다.

20대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아도 좋으니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림을 사랑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저 순수함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30대가 되자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경제적 활동을 위해 여기저기 부딪혔지만, 나는 조금 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하신 "그림으로 어떻게 밥 먹고 살래?"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경제적인 일에만 집중해보려 했지만, 그것조차 잘되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한 게 타로였다. 타로는 그림이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타로를 통해 나눌 수 있으니까. 타로를 통해 그림과 내면을 연결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순수한 꿈도 가졌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졌다. 돈이라는 개념 앞에 나는 늘 뜬구름 같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쳐버린 상태에서 나는 다시 묻는다. 왜 나는 자꾸 그림으로 돌아오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울이라는 감정과 너무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내와서 그런 것 같다. 이 친구는 참 매번 나를 무너뜨리지만, 그때마다 억울하고 상처받은 내 자아가 어떻게든 누구라도 들어주길 바라며 자꾸 표현하려 한다. 위로받고 싶다고, 서로 징징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깨닫는다. 이런 삶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아니, 그렇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내가 아름답지 않아도, 멋지지 않아도, 어른답지 못해도, 아무 쓸모 없어 보여도… 만약 당신이 가는 길에 조금 지친다면, 내 무언가를 보고 잠시라도 위로를 얻고, 행복한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행복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됐다. 행복은 내 기대를 만들고, 그 기대는 이루어지기 쉽지 않아 결국 절망으로 다가와 우울로 끝이 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불행해도 괜찮다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모두가 행복할 수 있겠느냐고. 나의 이런 글이 조금은 패배자의 기록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이상할 건 없다고.

그러니 부디, 다들 행복하시길. 그리고… 뭐랄까. 나만큼은 나를 좀 예뻐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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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에게 물었다
넌 왜 나한테 왔어?
넌 왜 나한테 와서 떠나가지 않아?

우울은 대답했다.
사람들은 다 나를 미워해
나도 사랑받고 싶은 것 같아
그래서 너에게로 왔어
내 존재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걸 알지만
난 이미 태어났고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해

우울이 하는 말이 꼭 나의 존재와 비슷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해내고 빛을 보는
그래야만 사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치고 있고
짐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 같았다

우울은 아마 나와 가장 닮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나와 가장 닮은 존재라고 생각하니 괜히 애틋했다

비둘기가 생각이 났다
비둘기도 점점 수가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피해만 줘서 늘 눈살을 찌푸리기만 한다
그럼에도 푸드덕 날아다니고
그럼에도 뒤뚱뒤뚱거리면서
너희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 비둘기조차
사람들이 먼저 평화의 상징으로 필요로 해서
이렇게 많아졌다는 게 참 웃기다

우울한 우리는
어쩌면 실수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처럼
언젠간 죽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억울해도
세상 이치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순리 같은 거겠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한테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너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다
그 누굴 탓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도, 신의 탓이라고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신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나는 그저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존재일 뿐이라고
내가 짐이 된 것도,
우울이 내 안에 깃든 것도,
다 신의 몫이라고
나는 그렇게라도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말마저 공허했다
결국 신도, 세상도,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남아 있었다

태어나고 싶은 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했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어진 모습으로
주어진 감정으로
주어진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우울도, 나도, 비둘기도
누구도 스스로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니 불쌍히 여기자
그저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우리를
비틀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존재들을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를 탓하기보다
그저 조용히 끌어안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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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려묘 상순이를 키우고 있는 집사입니다 ㅎㅎ

 

노트북을 차지한 상순이


상순이는 오늘도 그르렁 거리며 
나의 노트북 앞을 서성인다.
처음에는 노트북 위로 올라오지 않고
노트북 화면이 움직이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꼬마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올라와서 당당하게 키보드를 누르고 
마우스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하하

 


앉은뱅이책상, 집사의 적응기


사실 일을 할 때는 책상에서 하고 싶지만
상순이에게 포인트를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일을 하게 되었다.
하도 엄마가 이 작고 네모난 상자 앞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니
에라 못 참겠다 하고 올라와서
우다다 키보드를 누르고 가나보다.

 


밤마다 시작되는 상순이의 질주

밤만 되면 온 집안을 뛰어다니느라
바쁜 우리 상순이.
새벽에 잠을 자기가 어렵지만
그래서 같이 낮잠을 자게 된다.
자기 집에서 웅크려 자다가도
내가 잠자리에 누우면
어느새 호로록 다가와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발밑 사냥꾼 상순이


어렸을 때부터 유독 발밑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누우면 발을 가끔 움직이거나
문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보고 상순이는 또 사냥한다고
한참 물거나 긁어댔다.
고양이 무는 습관이 좋은 게 아니라지만
그냥 나는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잔다.
어차피 이 아이에게 화를 내보았자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그렇게 둘만의 경기가 펼쳐지다가
상순이는 고롱고롱 대며
내 다리에 착 붙어서 잠이 든다.
나도 어느새 이 아이를 잠자는 동안
차지 않게 몸을 조심히 다루게 되었다.
달콤한 시간이었다.

 


따뜻한 순간, 상순이가 있어 힘내는 하루


항상 눈을 뜨는 게 힘이 들지만
같이 깨어나 나에게 배를 보이며
눈을 맞추고 인사라도 하듯이
바라보는 네가 있으니,


나는 오늘도 힘을 내서 

이불 밖으로 나가본다.

 

 


그냥 상순이와 살아가는 집사 1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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